대학원생 시절, 연구는 나의 모든 것이자 나의 삶 자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데드라인에 항상 쫓기면서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았고, 연구 결과 하나에 울고 웃었으며,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실험이 계속해서 잘 안 될 때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가도, 또 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나오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새벽 메일함을 열었을 때, 내 첫 번째 논문의 개제 허락 메일이 도착했던 순간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무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개제 거절과 세 번의 리비전을 거친 뒤였다.
나는 그 여정에서 많은 빛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인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천재들이었다.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대학원이라는 기간을 불운하고 불행하게 보내었고, 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꼽자면 역시 대학원 시절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대학원 시절은 많은 역설과 복잡다단한 애증의 감정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고, 가장 비효율적인 시간이었지만 또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그 모든 과정을 다시 밟아보라면 지금은 엄두도 못 낼 것 같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
나의 대학원 생활
나는 결코 특별하거나 누구에게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대학원 생활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표준적인 대학원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대학원생만큼 신분이 어중간하고, 역할이 불분명하며, 앞날도 불투명하고, 해야 할 일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도 없다. 아마 대학원생들의 수만큼이나 특수한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내/국외, 분야, 학과, 세부 전공, 연구 주제에서 개별 교수님의 특성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대학원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설명할 소위 ‘대학원 연구 노하우’라고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떤 분야의 연구를 진행했는지를 대략적으로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국내의 이공계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왔다. 포항공과대학교 학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했으며 (그래서 학부를 5년 다녔고, 평점은 평균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같은 학교 대학원의 시스템생명공학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생 대학원에 1기로 입학했으며, 내가 1호 박사였다. 그만큼 고생을 했다).
생명과학과 컴퓨터공학의 중간 즈음에 있는 전산 생물학이라고 하는 분야를 전공하면서, 전통적인 생물학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코딩, 시뮬레이션, 데이터 분석을 모두 했다. 지도 교수님도 두 분의 교수님께 공동으로 지도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 설명할 연구에 관한 내용들도 대부분 이런 분야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다.
다양하고 잡다한 연구 경험
이것이 내 대학원 생활이지만, 내 ‘연구 인생’을 이야기하자면 사실 조금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내가 한 가지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내가 비교적 다양한 환경에서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내가 지금까지 거쳐왔던 연구 조직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것이다.
– BRIC 생물학정보센터 생물정보학 팀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남홍길 교수님 연구실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김상욱 교수님 연구실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류성호/서판길 교수님 연구실
– Stanford University, Department of Chemical & Systems Biology, James Ferrell Lab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 정준호 교수님 연구실
– KT종합기술원 바이오메디컬 인포매틱스 팀
–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중심병원
– 최윤섭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소
포항공과대학교는 학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학부생들도 연구실에 들어가서 연구 참여를 해야 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논문도 써야 한다. 나는 학부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BRIC 의 생물정보학 팀에 들어가서 연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생물학 관련 전공자라면 BRIC이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2003년에는 내부에 자체적인 연구 조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원 연구실, 기업 연구소, 병원에서 연구했으며, 식물학, 생물학, 생물정보학, 의학을 연구하는 곳을 거쳤다. 순수 연구와 사업개발을 위한 응용연구를 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이 있다. 학부생, 대학원생, 연구교수, 팀장, 연구소장 등으로 다른 사람 아래에서, 혹은 내 팀원 들을 이끌며, 현재는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역할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다. 많은 조직을 옮겨 다니기도 했고, 그만큼 줏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렇게 여러 형태의 조직에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연구를 했다. 때문에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연구 노하우” 슬라이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연구 노하우’ 집필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이야기해야 하겠다. 바로 ‘연구 노하우’ 슬라이드다. 아마 대학원에 있거나, 대학원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슬라이드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슬라이드는 원래 내가 우리 연구실 후배들을 위해서 만든 자료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포항공대 시스템생명공학부에 1기로 입학한 대학원생이었고, 우리 구조생물정보학 연구실 (김상욱 교수님)에서도 첫 번째 박사 졸업생이었다. 이 연구실은 교수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하시면서 연구실을 차리실 때 나도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이후 학부생-대학원생-박사후연구원 시절을 거치며 총 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었던 정든 곳이다.
나는 이 연구실을 떠나는 첫 박사 졸업생이었다. 보통 연구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 랩 미팅은 Farewell Seminar라는 것을 한다. 그동안 내가 연구실에 머물면서 했던 연구와 생활을 돌이켜보고, 랩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감사의 이야기도 전하는 기회이다. 나는 내 Farewell Seminar에서 내가 그동안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생각했던 연구에 대한 나의 개똥 철학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없더라도 남아 있는 후배들이 계속 잘 연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슬라이드였다. 그리고는 이 슬라이드를 내 하드디스크 속에 처박아두고 1년 넘게 까먹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오래된 슬라이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자료를 슬라이드 공유 사이트인 슬라이드 쉐어 (slideshare)에 올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슬라이드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공유, 공유, 공유, 또 공유되었다. 나는 사실 처음에는 그 슬라이드가 그렇게 화제가 되는지 몰랐다. 처음에는 내 메일 주소나 트위터 아이디 등 아무것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 연구 노하우는 (개정 증보판까지 합치면) 70만 번 정도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5만 번 이상 공유되었고 말이다. 혹자는 ‘슬라이드 계의 강남스타일(…)’ 이라고도 했고, ‘한국의 대학원생이라면 한 번은 봤을 슬라이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소셜 네트워크의 위력을 몸소 실감한 기회이기도 했고, 이를 통해서 많은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업로드한 내용이지만, 나 역시 많은 애착과 보람, 그리고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주의사항!
사실 이렇게 대학원 생활이나 연구에 대한 노하우라고 해서 결코 거창할 것은 없다. 대학원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든 지나갔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내용이다. 나 역시 실험이 끝나고 실험실 형들, 누나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면서 많이 묻고 또 많이 들었던 내용들이다.
무엇보다 이 내용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최소한 대학원 시절의 나에게는 꽤 효과적이었던 내용이지만, 현재의 당신에게는 해당되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결코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대학원생은 각기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하는 조언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선별적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또한 이 연구 노하우들은 나라고 항상 실천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고, 연구의 신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내 주위만 하더라도 나보다 연구 성과가 좋은 정말 후덜덜한 사람들이 많다) 이 노하우들은 연구가 가장 신나고 잘 되고, 스스로 신명이 나던 시기에 나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들일 뿐이다.
특히 연구가 잘 풀리지 않던 때는 이런 원칙을 의식적으로 더 실천하려고도 했고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부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마 그런 노력은 내가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상은 평생 계속되리라 생각한다.
서론이 길었다.
그럼 다음 글 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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