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거창한 이야기의 시작

우리는 인생을 산다.

하지만 그 인생이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되기까진 참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만약 흔히 말하는 “어른”의 정의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고 책임지는 단계”를 뜻하는 말이라면, 아마 대학원을 고민하고 있는 많은 분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못한 미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직 우린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쓰려는 글은, 바로 그 어른이 되기위해, 다시말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주체가 되기위한 한 과정으로서 대학원 생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하는 것이다.

사뭇 거창했던 도입부에서도 읽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런 글을 시작한 이유는 단지 사람들에게 ‘좋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팁’ 또는 ‘석사/박사 학위를 잘 받는 팁’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이 글들을 모두 읽고난 뒤엔 당신이 좋은 대학원에 진학할 팁을 얻었을 수도 또는 수월하게 석사/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고민하던 과정 중에 얻었을 부산물일 뿐, 그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님을 밝혀둔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려 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주제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며 그 부담과 한번도 정면으로 맞서서 질문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남들이 세워놓은 “통과의례”의 관문에만 허덕이다 늙어버릴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후엔 대학교를 가고, 대학교 후엔 대학원을 가고, 대학원 후엔 회사를 가고, 입사 후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자녀를 입학시키고….. 이렇게 눈 앞에 펼쳐진 통과의례만 해결하다보면 도대체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난 사회가 살아가라는 답안에 떠밀려 살기 바빴단 생각에 든다. 내가 떠밀려 갔던 곳엔 나처럼 떠밀려 온 남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늘 기다리고 있었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느라 나는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적어도 여러분의 연구 인생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구 생활은 사실 인생의 축소판이다. (사실 연구 생활도 인생의 일부이니 굳이 구분지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인생에서도 그렇듯 대학원 생활에서도 수많은 모습의 선택, 갈등, 도전, 성공, 실패와 마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대학원생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대학원 생활을 해가는 모습이 그들이 삶을 대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많은 학생들은 “대학 다음에 대학원” 또는 “회사 대신에 대학원”의 통과의례로서 떠밀려 왔으며, 대학원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대학원 생활이 끝난 이 후에도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대부분 그들은 불안함에 스스로를 또다른 통과의례에 몰아넣곤 하는데, 나는 이러한 쳇바퀴가 인생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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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의 삶이 끝이 없다…

누가 이렇게 살라고 시켰을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엔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가 우릴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고, 이후엔 치열한 경쟁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회는 줄에서 이탈한 자들을 낙오자라 불렀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달콤한 빵을 나눠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대학원에 와서까지 우리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늘 떠밀려왔던 과거와는 달리, 나는 언젠가는 어른으로 거듭나야 했으며, 독립적인 주체로서 내 삶을 장악하고 컨트롤해야 했다. 나는 대학원 속에서의 삶의 변화가 그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진 누군가가 내주는 문제를 열심히 풀어 누군가가 평가해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턴 다르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스스로 푼 뒤 그것을 스스로 평가하는 삶으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 문제를 풀어야하는가’이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이 문제를 풀면 남들에게 고용당하기 쉬울까봐…? 그 이유만으론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대학원 생활이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그래야 내가 늘 재미있게 연구에 달려들 수 있을 것 같고(self-motivated), 그래야 더 좋은 성과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인생이 그렇다. 내 인생의 미션을 내가 스스로 주지않는다면 또 누가 줄 수 있으랴. 만약에 우리의 미션을 남들이 주고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세상의 부속품, 회사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 대학원에 온 것이라면 부디 주체적인 대학원 생활 하루하루를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글이 그러한 변화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우리는 대학원 진학부터 졸업까지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하게될텐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학원 생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역시 대학원 생활의 꿀팁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를 이야기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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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년 만에 학사모를 쓰던 날

나에 대하여…

함께 글을 쓰시는 다른 두 분(최윤섭님, 권창현님)은 각자 소개할 것이라고 믿고 내 소개를 해보려고 한다. 소개는 셀프. #살아나는_드립력

나는 2002년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에 입학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입학했다. 겸손의 말이 아니다. 나는 내 스스로 가장 밑바닥 성적으로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대학교 1학년 생활을 하며 학생들의 높은 수준에, 그리고 나의 저급한 수준에 수많은 좌절을 해야만 했다. 미적분학 드랍은 기본. 우여곡절 끝에 돌고돌고돌고돌아 결국 6년 만인 2008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땐 이미 재수강으로 1학년 성적표가 갈아 엎어진 후 였다.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가만히 앉아 책 읽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내가 학교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도 억울한데, 집에 와서까지 왜?’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지금도 책 읽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지금도 늘 ‘나는 과연 공부를 해도 되는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나의 취미도, 특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의 길을 택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텅 빈 채로 떠벌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떠벌리고 있다. 지금도 떠벌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공부마저 안하고 있었다면…. 나는 아마 텅빈 깡통으로서 내 스스로를 사기꾼이라며 자학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08년부터는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시작했다. 공대에서 수학을 가장 잘한다고 알려진 서울대 박종우 교수님 (일명 Frank Park)의 지도 하에 공부를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수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수학 잘하는 사람들을 동경 하기에 계속 수학책을 붙잡고 있어보려 했다. 그러나 역시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지 나는 늘 책의 앞페이지만 뒤적이고 있었다. 석사 때의 연구주제는 로봇의 모션 계획(motion planning)에 관한 연구였다. 이 주제는 외국에선 컴퓨터공학과(CS)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주제인데, 그래서 나는 기계과도 아니고 컴퓨터과도 아닌 애매한 사람이 되어 졸업을 하였다. (참고로 난 컴공을 부전공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난 ‘왜 vim 같은 걸 쓰라고 하는거야?’라는 푸념 외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메멘토)

2010년부터는 LIG넥스원에 전문연구요원으로 입사해 국방로봇을 개발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말이 대기업이고 말이 신사업이지, 선임 한 분과 박사님 한 분, 그리고 신입사원 두 명이 이끌어가는 로봇팀은 새로 생긴 구멍가게와 다름 없었다. 그 “일당백”의 조직에서 나는 끊임없는 야근과 특근을 반복해야 했는데, 덕분에 그 때가 바로 내 삶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 회사는 내 길이 아니구나…. 이후 나는 2012년 한국과학기술원(KIST)으로 자리를 옮겼고, 회사에서 하던 외골격로봇(exoskeleton, 일명 아이언맨) 연구를 벗어나 내가 늘 공부하고 싶던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현재의 워털루 대학(University of Waterloo)에 입학을 하였다. 나폴레옹이 죽었던 그 워털루 전투의 그곳이 아니라, 그냥 캐나다의 토론토 옆 소도시 워털루이다. 참 더럽게 재미없는 도시다.

내가 걸어온 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는 기계공학과에선 컴퓨터공학에서 다루어지는 연구를 했고, 회사에선 다시 기계설계를 맡았으며 현재는 전기공학부에서 기계학습을 하고있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안에선 일관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믿는 철학을 향해 연구를 해왔고, 비록 지금까지의 성과는 미미하지만(ㅠㅠ) 곧 폭발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쯤 되면 의심해 볼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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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세 명의 저자가 처음으로 책 출판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모습.

사실 고작 박사과정생인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될지 많이 조심스러웠었다. 왜냐하면 내가 느껴왔던 것들이 편협한 시각일 수도 있고, 또 난 아직 대학원 생활 중이기에 내 대학원 생활의 끝이 안좋은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어ㅠㅠㅠㅠ 그렇기에 내가 앞으로 할 이야기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애초부터 정답을 말하려 했다거나 또는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느 위치에서든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라고 믿는데, 나 역시도 현재 박사과정의 위치에서 분명 기여할 부분이 있다고 믿는다. (아마 그 중 하나는 내가 청년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도 아재는 아재) 따라서 나는 나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며, 비록 나의 생각이 조금은 부족해보이고 조금은 틀린 지점이 있더라도, 부디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생각 중 하나로서 너그러이 받아들여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드디어 긴 항해를 시작한다. 거창한 시작이다. 비록 쉽지않은 여정이 되겠지만 기나긴 여정 끝엔 나도 성장해 있고, 다른 작가님들(=박사님들)도 성장해있고,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도 성큼 성장해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드디어 시작.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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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프롤로그: 거창한 이야기의 시작”

  1. 우와 저랑은 반대네요 ㅎㅎ 전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유학? 가는, 곧 석사를 시작하는 학생이에요~
    저는 undergrad에서 물리 (관련) 전공을 했지만 흥미를 못느끼고 저두 공부를 정말 싫어했는데요
    2학년때 일렉으로 들은것에 관심이가서 전공바꿔 뒤늦게 가요 ㅎㅎ 성적은 당연히 똥망이었구
    심지어 4년 honours degree가 아닌 3년짜리 bachelor’s degree를 가지구 당연히 캐나다에선 대학원에 갈 수 없으니 한국으로 알아보았어요 언더그래드 전공으로요 ㅋㅋ 다른포스트에서 말씀하신 일종의 도피였죠. 그러던중 지금 전공 하려하는것에대해 알게되었고 다시 원서를 넣어 이걸로 유학길에 오르게되었네요. 캐나다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떨리기도하고 아직도 비전공자인내가 가서 잘 할수있을지 걱정되기두하구요 ㅎㅎ
    전화인터뷰때 교수님이 열정이 보여서 좋다고 하셨는데 취직을 위한 그런돌파구로생각하지않아서였나보다라고 다른포스팅을 읽으며 느꼇습니다 ㅎㅎ 글도 재밌게 잘 쓰시고 유익한 정보,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되는 그런 글이 많은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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