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학생, 나쁜 학생, 이상한 학생 (1편)

지난 수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다양한 배경과 성격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만나봤다. 내가 지도했던 학생들도 있고 내가 강의했던 수업을 통해서 그리고 박사논문 심사위원으로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학생들도 있다. 그 중 몇몇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학생 A

이 학생은 석사과정 중에 처음 만났다. 내가 강의했던 — 대체로 박사과정 학생들이 듣는 — 수업을 통해서 만났다. 그 학생은 수업 중에 그리 빛나는 학생은 아니었다. 시험 성적이 아주 우수하지도 않았고 수업 중에 나를 애먹일만한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학생과 함께 일하고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석사과정 학생이든 박사과정 1년차 학생이든 수업 중에 눈에 들어오고 지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학생은 주로 시험 성적이 좋거나 수업 중에 질문과 토의를 통해서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학생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이 학생과 일하고 싶었다.

이 학생은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 틈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던지, 내 사무실로 종종 찾아와서 여러가지 질문들을 했다. 나는 이 학생과 강의실이 아닌 내 사무실에서 만나면서 호감이 생겼다. 이 학생은 나를 만날 때, 궁금한 질문의 목록을 미리 작성해서 왔다. 차례대로 숫자가 매겨진 목록이였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내가 강의한 내용의 중심 줄거리가 되는 부분의 맥을 정확하게 짚는 것들이었다. 비록 내가 가르치고자 했던 바를 순식간에 알아듣거나 그것을 넘어서서 날카로운 질문들을 쏟아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자기만의 페이스로 정확히 맥을 짚어가며 공부를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험성적은 여전히 좋지 못했고, 나는 최종적으로 이 학생에게 ‘B-‘를 줬다. 대학원에서는 아주 나쁜 평점이다. 그러나 나는 이 학생이 마음에 들었다.

그 수업이 열렸던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학생에게 함께 연구할 것과 석사 학위 논문을 쓸 것을 제안했다. 거절당했다.

자신은 연구에 큰 관심이 없고 수업석사과정에 필요한 학점을 채워서 최대한 빨리 졸업하는 것이 목표라는 이유였다. 박사과정에 갈 일도 없으니 석사 학위 논문이 필요하지도 않단다. 하지만 한 번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다. 수업과 관련된 질문 때문에 내 사무실에서 만날 때 종종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연구주제에 대해서 소개해주기도 했다. 학기가 끝나고나서야 연구에 대한 관심이 생겼는지 내가 말한 연구주제로 석사 학위 논문 연구를 해보겠다고 했다. 연구주제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해왔던 터라 당장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구를 진행하던 도중 첫번째 걸림돌은 데이터였다. 필요한 데이터는 정부 웹사이트에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데이터 수집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신의 연구에 이 데이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노가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엑셀 스프레드시트 한 페이지에 불과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서 두어달을 꼬박 보냈다.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연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주기적으로 만났는데, 여전히 잘 정리된 질문 목록을 가지고 다녔고, 내가 이야기 해주는 것들을 미팅 중에 요즘을 잘 파악하여 정리해 노트에 받아쓰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음에 해야 할 일도 명확히 해서 노트에 정리했다.

나는 이 학생이 마음에 들었기에 석사 학위 논문 연구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박사과정 진학을 제안했다. 거절당했다.

여러 개인 사정에 대한 이유도 있었지만, 아직 연구라는 것에 ‘박사과정’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할 확신이 없다고 했다. 석사 학위가 끝날 즈음에 연구가 꽤 재미있는 것 같다면서 박사과정 진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기뻤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나는 이 학생을 지원할 연구비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학과에 요청했더니 다행스럽게도 수업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첫 연구는 석사 연구의 후속연구였다. 중간 중간 몇몇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알고 있는 연구 주제였기 때문에 큰 탈 없이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석사 연구와 박사과정의 첫 연구는 이 학생의 많은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나는 그 두 논문을 이 학생의 논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논문으로 생각한다. 두 사람의 공동연구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말이다. 기본 아이디어 구상부터 실제 글쓰기 까지 많은 부분이 내 손을 거쳤다. 대부분의 박사과정 학생의 논문이 이런식이다. 지도교수의 손과 머리를 많이 거친다. 전공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내 전공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이 학생A의 박사학위 논문은 좀 달랐다.

박사과정 첫 연구를 마무리 할 때 즈음, 이 학생이 자기는 전혀 다른 분야의 연구에 흥미가 생겼고 그 쪽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학생에게 연구 주제 전환의 장단점을 이야기 해줬다. 주로 앞으로 벌어질 어려움에 대한 단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지도교수인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가 아니므로 세세한 지도는 어렵다는 점과 연구가 어려움에 빠졌을 경우 내가 좋은 해결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학생의 새로운 연구 분야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고, 결국 그 분야로 연구를 진행했다. 다행히 몇 몇 학회 참석에서 주워들은 것들이 있었기에, 나도 처음에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었다.

연구를 시작하고 연구 방향을 어느정도 잡았을 즈음, 또 다시 데이터 수집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 학생은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서 알아봤다. 주변의 연구센터에 문의하기도 했고, 여러 관련 연구자에게 연락을 취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직접 수집하기로 했다. 이번엔 웹사이트 몇 군데 돌아다니면서 수집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실험을 해서 그 결과를 발표한 논문을 하나씩 찾아서 읽어보고 보고된 수치 한 두개를 기록해야 하는 일이었다. 천편이 넘는 논문을 검토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사한 연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선 수많은 학부생 연구원을 고용해서 한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수많은 학부생 연구원을 고용할 수 있는 연구비가 없었던 터라, 학생A는 혼자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1년 정도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수학적 모델을 손보고 연구 방향을 수정하는 등 많은 일을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데이터 수집에만 1년이 걸린 셈이다. 수학 모델을 바탕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들고 실험에 들어갔다. 2년 정도가 더 지나서 이 학생은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학회에서는 최우수 논문상을 받기도 했다.

이 학생은 내가 만난 학생 중 박사과정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잘 보낸 학생들 중 한 명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박사과정을 지낼 분들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 본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이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라는 것이다. 내가 이 학생의 개인적인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나, 적어도 박사과정, 연구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 만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대로 이끌어 나갔다. 자신의 연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학생의 박사 학위 논문에 내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으나, 나는 이 학생의 학위 논문은 온전히 그 학생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박사과정 학생이 성공적으로 학위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가늠해 보는 잣대로 삼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지도교수와 얼마나 자주 연락을 취하고 싶어 하고 의사 소통을 하고 싶어하는지이다. 나는 학생들과 매주 정기적으로 개별 미팅을 갖고 있다. 어떤 학생은 그 사이에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이메일을 보내지도 찾아 오지도 않는다. 하던 일이 끝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하거나 막힌 부분이 있어서 같의 의논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음 주에 있을 정기 미팅 시간 까지 기다린다.

하지만 어떤 학생들은 미팅을 갖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오거나 다시 찾아온다. 미팅이 끝난 뒤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뭔가 정리가 덜 된 부분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다음 주 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연구를 진행하다가 좋은 결과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혹은 또 다시 걸림돌이 생기면, 그에 대한 대화가 필요해서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이메일이 오거나, 추가적인 개별 미팅을 요청 하기도 하고, 지나가다 내 사무실로 불쑥 찾아 오는 일도 있다. 자신의 연구를 진행해야 되는데, 막힌 부분이 생겼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지도교수의 도움 혹은 의견이 필요한 일이 생겼고, 다음 주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A가 바로 그랬다. 지나가다가 내 사무실의 문이 열려 있으면 불쑥 찾아와서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 횡설수설하는 경우는 없었다. 잘 정리된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고, 충분히 생각을 해 봤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연구를 했다. 처음 시작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아이디어였든, 지도교수의 아이디어였든, 자신의 연구를 했다.

박사과정은 학생이 자신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 지도교수의 경험과 시간을 빌리는 곳이다. 이 학생A는 아주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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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oughts on “좋은 학생, 나쁜 학생, 이상한 학생 (1편)”

  1. 항상 감사히 글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질의할 내용이 생겨서 적습니다.

    왜 그 학생에게 b-를 주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학생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1. 시험을 못 쳐서요 ^^; 제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라 조심스럽습니다. 신상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해해주세요.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2. Hi Jan,I can so relate to your comment. I’m pretty much an open book too. But I’ve had to learn over time not to tell everyone everything that’s going on in my life. A little bit of mystique is not such a bad thing!

  2. 좋은 경험과 생각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이번 달 박사 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의 연구를 해야 한다, 교수님이 주신 아이디어라도 결국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교수님께 먼저 찾아가 토론을 하고 (가끔은 연구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하고요^^;) 지시하지 않은 실험을 아이디어 가지고 먼저 하게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안풀리던 문제가 풀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고 연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먼저 읽었더라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글을 읽었어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후배 대학원생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깨달았으면 합니다. 다시한번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3.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과, 교수님께 자주 찾아가 디스커션하는 것은 약간 상반되는 내용 같습니다.
    혹시 교수님을 자주 찾아 뵙는것 자체가 교수와의 친밀도에 영향을 주어 학생 평가하는데 영향을 주었지 않았을까 의문을 던져 봅니다.
    좋게 말하면 커뮤니케이션 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치질이죠.
    학생 능력에 상관없이 정치질에 학생의 모든것이 평가 받는 면이 없지 않는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희 동네에선요.
    정치질도 능력이죠, 하지만 그게 5할 이상을 차지하는것 같습니다.
    학생 평가가 디팬스후 교수님 대접하는 저녁자리의 양주 년산으로 갈린다는게.. 참 거지 같네요.
    이상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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