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뭘 해도 불안하다

2016년 봄에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2018년 겨울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짧은 글로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즈음에 고민이 많았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고민이 많았고, 자퇴한 뒤 짧은 직장 생활 뒤에 유학을 와서 다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길이 맞나? 이 길이 내 길인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박사과정 동안 연구와 관련 없는 수많은 고민을 하고 지냈고, 졸업 후 교수가 되어서도 여전히 본업과 관련 없는 수많은 고민을 하고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해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에 둘러싸여 사는 줄 알았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는 시기이다. 내가 나의 선택을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같이 수업 듣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다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저마다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대학생 때까지는 누가 봐도 ‘학생’이라는 신분이 확실하다. 주변에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고 대체로 비슷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취직하는 친구, 창업하는 친구, 여행을 떠나는 친구, 다른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친구, 다른 나라로 공부하러 떠나는 친구, 성직자의 길을 찾는 친구, 구도의 길을 떠나는 친구 등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내가 나 스스로 뭔가 결정해서 내 인생을 살아본 일이 잘 없었다. 기껏해야 어느 대학에 갈지 정했다. 대학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대학에 가니까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기껏해야 어느 전공을 택할지 정했다. 다른 친구들도 전공은 하나씩 다 있다. 숙제 문제를 이렇게 풀지 저렇게 풀지 정했고, 프로젝트는 어떤 주제로 할지 정했다. 오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실지 맥주를 마실지 정했고, 시험공부는 유체역학부터 할지 동역학부터 할지 정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결정을 내리며 살다가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나처럼 대학원에 가기로 한 친구들은 그 수가 많이 줄었다. 유학을 결정하고 나니 같은 결정을 한 친구는 한둘. 지도교수를 정하고 연구 주제를 정하고 나니, 당연하게도, 나랑 같은 결정을 한 친구는 없었다.있으면 큰일나지

나는 내가 다른 나라의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친구도 못 만나고 외로운 줄 알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국에서 취업한 친구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 다들 바빠져서 예전만큼 자주 만날 수는 없더라. 방학 때 한국 가서 친구들 만나보니, 다른 친구들도 그때야 오랜만에 만나더라. 나는 내가 박사과정에 와서 끝이 보이지 않는 연구를 하느라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괴로워하는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도 다 나랑 비슷한 고민 하고 있더라.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몇백만 원 받아가며 일하며 바쁘게 지내는 친구들이 월급이라고 해야 할지 생활보조금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돈 받으며 보이지 않는 졸업을 기다리며 겨우 지내고 있는 나를 부러워할 때도 있더라.

이제 와서 뒤를 돌아보니, 대학원생이라서 했던 것 같은 고민이 사실은 그냥 그때 그 나이 때 해야 되는 고민이라서 했던 것들이 많았다. 주어진 환경에서 적당히 살다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하고, 그 결정에 온전히 내가 책임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 때문에 느껴지는 부담감으로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의 문제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겪었던 문제 중에선 내가 ‘대학원에 왔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은 별로 없었다. 어떤 선택을 했어도 생기는 문제였을 거다. 연구가 잘 안 되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다.

그냥, 그 나이 때는 뭘 해도 불안하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그 나이 이후로 계속 불안하리라는 것. 응?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고 계속 불안하다가 테뉴어를 받기 전후에 잠시 안정된 것 같았는데,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되나?’ 하는 고민이 또 생기고 다시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돌아보니 내 나이 또래 친구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그냥 이런 거 고민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마다 시기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내 고민만 특별한 건 아니고, 때 되면 해야 하는 고민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 별로 없다.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별로 없고 몰라도 된다. 알아도 고민하고 몰라도 고민한다. 때 되면 알게 된다. 연구가 잘 안 되고 논문이 잘 안 써지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글을 쓰긴 했는데, 처음에 프롤로그에서 바랬던 것처럼, 이 책이 대학원생 여러분이 내린 결정 잘 따라갈 수 있게 등이나 잘 떠밀어주면 좋겠다.



* 블로그 내용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책으로 발간하였습니다. 리디북스,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반디앤루니스 등의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전자책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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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thoughts on “에필로그: 뭘 해도 불안하다”

  1. 30대 초반으로 이제 막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에 오고보니 학부 때 나름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새발의 피처럼 느껴집니다. 대학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달려왔는데 대학원에 들어오니 이곳은 제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연구 주제와 딱 맞는 수업도 없는 것 같고요(아직 제가 모르는 수업, 프로젝트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글을 보고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 나이 때 거처야 할 자연스러운 시기라는 것을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 대학원은 대학과 많이 다르지요. 다른 일들도 그렇겠지만, 연구라는게 재미있는건, 해보기 전까지는 이걸 내가 하고 싶은건지 하기 싫은건지 잘 판단이 안 됩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보면 내가 생각했던 문제가 아니고, 하기 싫었는데 하다보니까 재밌는 구석이 발견되고 그렇습니다. 차근차근 잘 준비하셔서 즐거운 대학원 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래요 🙂

  2. 학위를 받은지 이제 1년 가까이 되어가는 프레쉬박사입니다. 글을 남길까 말까 고민하다 학위과정 중 힘들었던 시기에 교수님 포스팅을 보고 정신차린게 기억나 감사 인사차 글을 남깁니다. 오늘 포스팅한 글도 인상적이네요. 학위를 시작하던 시기.. 아직 학생인데 둘째 임신 소식을 듣던 순간.. 학위받고 난 후.. 순간 순간이 불안하더라구요. 교수님 포스팅 중에 실패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글은 많은 상황에서 위안이 되면서, 현직 교수도 실패하는데 난 아직 멀었구나라는 생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도록 하자라는 생각에 더 전공 공부에 매달렸던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곱씹으면서 힘들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서랍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일면식도 전혀 없고 전공도 다르지만 연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을 통해 이렇게 큰 도움을 받아서 송구스럽고 감사합니다. 저도 제 경험을 공유하여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줄 기회를 찾아야 겠습니다. 감사하고 건강하세요.
    PS: 글을 다 적고 생각난 건데, 계간권창현을 보고 저도 매 분기별로 하나 이상의 논문을 쓰는 좋은 버릇이 붙는 것 같아 매우 뿌듯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아 기억에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1.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한테도 힘이 많이 되네요. 어떤 심정이었을지 공감이 많이 되어 댓글을 여러번 읽었습니다. 좋은일 많이 생기시길 바랍니다.

  3. 늘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직 마누라에게 진로를 못 정한 사춘기라는 놀림을 받곤 하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1. 사춘기 ㅎㅎ 전 요즘 ‘불혹’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혹은 개뿔… ㅎㅎ

  4. 석사과정 3차수 밟고있습니다. 입학할 즈음 구독했던 것 같은데 버티는데 제일 큰 영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5. 박사3년차, 퀄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맨날 하는 고민이 “내가 유학을, 그리고 박사공부를 시작해서 매일 이렇게 괴롭고 불안한가” 였습니다. 사실 오늘은 또 그 고민의 극에 달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먼저 비슷한 길을 앞서간 분의 글을 보니 위로를 받네요. 스크랩 해 놓고 고민이 생길 때 마다 읽어봐야겠습니다. 혹시 공부하실 때 딴짓? 은 많이 안하셨나요? 저는 공부하거나 연구할 때마다 딴짓을 너무 많이 해서 괴롭습니다 ㅠㅠ 집중력이 3초 수준 같은 요즘입니다 흑흑..

  6. 교수님께서도 불안해하시고 고민하신다는것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석사 3학기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이 시점, 졸업 후 윈하는 곳으로 박사 진학을 못할까봐 조금 불안해 하고있었거든요 저의 불안이 특이한 것이 아닌 누구나 느끼는 불안이라는점, 앞으도 계속될거라는 점에서 불안감을 잘 받아들이고 관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전의 좋은 학생, 나쁜학생, 이상한 학생도 진짜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ㅋㅋ 이번글도 재미있고 감동적이네요

    1.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하는 곳으로 박사 진학 하시게 되기를 바래요. 혹 그렇게 못 되더라도 즐겁게 연구할 수 있는 곳은 많을 겁니다.

  7. 저는 일본에서 석사 3학기를 이제 시작하는 대학원생 입니다. 좋은 내용뿐만 아니라 글을 재미있게 쓰시는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8. 독일에서 석사 졸업준비중인 학생입니다. 이곳에 세분이 올려주시는 글 하나하나 너무너무 공감하며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평소에 생각하는것, 고민하던 문제들이 어쩜 이리 똑같이 나오는지 신기해하며 위로받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항상 도움이 되는 좋은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9. 안녕하세요. 학부 시절부터 교수님의 글을 읽다가, 어느덧 미국 박사과정까지 와서도 읽고 있는 학생입니다. 오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신 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앞서 가신 분들의 조언으로 박사 과정에 와서도 연착륙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후로도 많은 일을 겪겠지만 이 글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남은 한 해 잘 보내시기를.

  10. 안녕하세요 핀란드에서 석사 중인 학생인데, 제가 이글을 먼저 읽고 석사를 결정했다면 참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한창 논문놓고 프로포절을 쓰고있는데.. 제가 진짜 열정있어서 연구를 할려는건지 고민중 이였거든요.. 들어오기전에 고민했어야 했던 것들을 미뤄놓은것에 대한 벌을 이제야 받는거죠 ㅠㅠ 진짜로 제가 하고싶은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다시 시작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 공유 감사드려요~

  11. 안녕하세요. 전부터 이 페이지의 존재는 알고 간간히 떠도는 글을 보긴했지만, 오늘 유독 맘이 지쳐서 들어와서 몇개 훑다가 이글을 보고는 눈물이 났어요. 미국에서 유학하는 새내기 박사생인데, 이제 1년이 어느덧 지나 학기말을 향해 달려가고있네요. 처음에는 와서 너무 힘들었어요. 수업 로드도 많고, 학부부터 휴학한번없이 석사 졸업하며 유학준비한다고 달려오다보니 burn out도 되고… 미국애들도 대학원 오는 친구들 다들 너무 영특하고 나만 뒤쳐지는것같고… 저번학기를 지나 이번학기는 좀더 나을줄알았는데 수업도 너무 어려운걸 들어서 부담이고 처음하는 TA도 힘들고 1년이 지나있는데 아직 뚜렷한 결과분석도 수업에 치여서 못했고, 교수한테도 미안하고 나한테도 미안하고 그렇더라고요. 원래 시험기간이 되면 생각이 많다보니, 또 기말을 앞두고 “과학자만 바라보고 왔는데 이게 과연 옳은 길인가”, “나는 박사를 할그릇인가”, “나만 힘든걸까”, “내가 너무 나약하고 걱정이 많은것같아”라는 생각으로 요며칠 자꾸 힘들더라고요. 근데 20대중반이라는 시기가 글에 풀어쓰신것처럼, 새로운 세계에 적응을 해가며, 어쩔때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되돌아보게되고, 가끔은 주춤하게되는 시기라는 말한마디를 읽는게 마음의 위로가 되는것같아요. 나만 그런게 아니라, 어쩌면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나의 친구들도 다 서로가 가보지못한길을 동경하고, 본인의 선택에 의문점을 품을때도 있으며 사는것이겠죠?

  12. 안녕하세요. 석박통합 3년차가 이제 반이 넘어가는 학생입니다. 3년동안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3년 째 그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생이기도 합니다. 일요일에 밤 10시까지 실험하고 negative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갖고 있었던 졸업에 대한 불안, 무기력이 폭발하여 멍 하니 앉아있다가 교수님 글을 보고 눈물 찔끔 흘리게 되었네요.
    글을 읽고 마치 잘 알던 아주 가까운 선배님이 위로를 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 잃고 있던 의욕도 조금은 되찾았습니다.
    요즘은 너무 무기력해서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것도 그냥 당연하고 지나갈 고민이었으면 좋겠네요.
    위로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3. 학부생때는 내가 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100%자신하며 들어온 대학원이었지만, 정말 내가 연구를 계속 할 만큼 우수한지, 그만큼 좋아하는지, 이 일을 계속하면서 앞으로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들었는데..불안한것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많은 위로를 받은것만같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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