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박사과정 기간을 제법 훌륭히 보낸 학생 A를 만나봤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학생들을 만나보자.
학생 B
학생 B는 지도교수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며 존중할 줄 아는 심성을 가진 학생이었다. 지도교수는 학생보다 대체로 경험이 많고 연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분명 학생이 지도교수의 말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학생 B는 그 정도가 지나쳐서 지도교수가 말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시간을 보내거나 의견을 내거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거나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학생은 매주 정해진 미팅시간 이 외에 지도교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서류처리 따위를 위해서 지도교수의 서명이 긴급히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미팅시간에는 주로 학생과 교수가 몇가지 아이디어에 대해서 의논하다가, 그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고, 한 번 간단히 시도해보고 잘 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해보자라는 식으로 마무리짓곤 한다. 학생 B는 ‘그 괜찮아 보이는 한가지 아이디어’에 대해서 ‘미팅 시간에 의논했던 그 간단한 시도’를 적당히 해 본 뒤 그 다음 미팅시간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가 걸렸건, 실패를 했건 성공을 했건 상관없이 말이다. 자신이 직접 판단해서 무언가 모험적인 시도를 하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 학생과는 2년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연구가 진척이 있었을리 없었고, 학생과 나 모두 지쳤다. 결국 이 학생은 박사과정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둬야했다. 이 학생이 그만두게 되는 과정에서 학과의 대학원생 지도를 총괄하는 교수님과 면담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지도교수의 의견에 ‘아니오’라고 해도 된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놀랐다고 했다.
학생 C
학생 C는 중도에 지도교수에게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중간에 지도교수를 바꿔야 했던 학생이다. 학생 C는 수업 성적도 좋았고, 연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들도 제법 잘 하는 학생이었다. 지도교수와 여러가지 연구 및 개발 프로젝트를 했고, 그 일을 바탕으로 논문도 출판했다. 다만, 중간 중간 갑자기 연락이 안되고 사라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한 번은 논문 제출 기한을 한 달여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차에 이 학생과 연락이 안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논문 제출 기한을 넘겨서 다시 나타났다. 화가 난 지도교수가 추궁을 하니, 인터넷 및 전화가 되지 않는 산악 지대에 있는 국립공원에서 야영장 관리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고 했다. 학생 C는 더 이상 그 지도교수와 일할 수 없었고,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야했다.
학생 D
학생 D는 수업 성적이 아주 좋은 학생이었다. 학과 내 다른 대학원생들과 비교했을 때 수업 성적으로는 최상위 5% 내에 들어가는 학생이었다. 학부과정과 석사과정을 좋은 대학에서 보내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이 학생이 박사과정 1년차 때 들었던 수업에서는 모두 최고 성적을 받았으며, 이 학생을 가르쳤던 교수들은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다.
이 학생은 무사히 졸업 하긴 했으나, 이 학생과 함께 했던 연구가 썩 즐겁진 않았다. 정해진 연구 회의 시간을 미루는 일이 잦았고, 연구가 진행되는 속도도 더뎠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겠으나, 내가 의심컨데 학생 D는 전형적으로 ‘강의실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만 연구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답이 있음이 잘 알려진 연습문제를 교수가 알려주는 방법으로 ‘열심히’하기만 하면 잘 되는 수업에서는 정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공부하지만, 연구는 그렇지 않음에 어려움을 느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연구에 집중하지 못 하고 결국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연구에서는 답도 없고 정해진 시간도 없다. 동기부여도 부족했고 그로 인해 시간 관리도 잘 하지 못 한 것 같다.
학생 E
학생 E도 학생 D와 비슷했다. 수업시간에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해야 하는 연구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연구보다는 수업 성적에 더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학생 D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듯 했으나, 그보다는 훨씬 더 좋은 연구를 했고 더 좋은 성과를 냈다. 내가 판단컨데 가장 큰 차이점은 학생 E는 지도교수의 연구실에 자주 찾아와서 여러가지 질문을 하고 의논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학생 D는 연구와 관련된 궁금증으로 지도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학생 A만큼 자주 왔던 것도 아니고 질문이 잘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학생 E는 자주 찾아와서 연구와 관련된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면서 자기 연구를 해나갔다. ‘강의실 모드’에서 ‘연구실 모드’로 바뀌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그 지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학생 F
학생 F도 중간에 지도교수를 바꿔야했다. 처음 만난 지도교수와는 1년 정도를 같이 보냈는데, 그 지도교수가 불같이 화를 내며 이 학생과는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음을 통보했다고 한다. 상심 끝에 새로운 지도교수를 찾는 과정에서 나와 연락이 되었고 함께 해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학생과의 연구를 굉장히 즐겼다. 학생 A만큼 독립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성과를 보였다. 연구 성과가 나왔을 때면 다음 주의 미팅 시간 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이메일로 소통을 했고, 때로는 내 연구실에 찾아와서 연구 진행 사항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내기도 했다. 미팅 시간에 정한 ‘이번주에 해보기로 한 것들’을 마치자마자 그 다음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판단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또, 내가 ‘참’이라고 믿었던 몇가지 생각의 오류를 발견해 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생각에 대한 오류도 자기 스스로 발견해내기도 했다.
이런 학생은 교수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된다. 나는 이 학생을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교수의 의견을 적절한 선에서 존중하여 말을 귀길울여 듣되,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교수의 생각을 의심할 줄 알았다. 내가 제안했던 방법이 잘 되었을 경우에는 그 다음 단계를 미리 보고 자신 만의 로드맵을 만들어 나갔으며, 내가 제안한 방법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만의 대안을 만들고 시험할 줄 알았다. 연구는 그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지 않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교수라고 다 알 수는 없다. 언제나 100% 확신을 가지고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스스로 오래 반복해서 생각해보거나, 혹은 주위의 동료 연구자의 의견을 물으면서 검증해나간다. 그 ‘동료 연구자’가 내 지도학생이라면 아주 큰 힘이 된다. 나는 학생 F가 굉장히 자랑스럽고, 이 학생을 지도하면서 많은 기쁨을 누렸다.
이 학생이 왜 첫번째 지도교수에게 이별통보를 받아야만 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학생이 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단지 그 지도교수와 잘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학생 F는 성공적인 박사과정 기간을 보냈다.
내가 바라는 박사과정 학생
내 생각에 박사과정 기간을 가장 훌륭히 보냈던 학생은 학생 A와 학생 F인 것 같다. 다른 학생들이라고 지금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박사과정 기간에서만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새로운 박사과정 학생을 뽑을 때 바라는 학생 유형은 역시 학생 A 또는 학생 F이다. 그러면 그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이었나를 돌아보면 나는 두 가지로 정리한다. 호기심과 책임감.
교수들마다 박사과정 학생에게서 보고자 하는 점들이 다르겠지만, 나는 ‘호기심’ 있고 ‘책임감’ 있는 학생을 바란다. 글에서 계속해서 학생이 지도교수를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가를 강조했다. 연구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지도교수를 찾아오지 않고 무작정 다음 미팅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을 볼때면 ‘궁금해서 어떻게 기다리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지도교수가 제안한 방법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아보지 않는 학생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지도교수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은 이유가 왜 궁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나는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며 해결책을 찾아내거나 이유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학생을 바란다. 책임감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연구는 자신의 것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다 보면 없던 호기심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성은 그 다음 문제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모든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기는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다른 학생들
위에 소개한 학생들은 내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학생들이다. 다른 분들의 글 속에서도 참고할만한 사례가 있으니 소개한다.
먼저 “Applying to Ph.D. Programs in Computer Science”라는 글에 나오는 사례다.
Student X comes from famous school Y in country Z, where he was ranked 5th out of over hundreds of thousands of students and #1 in his college graduating class. The student comes to graduate school expecting to be the best and starts working very hard on research. By the end of his first or second year, the student realizes that he has not yet published any papers. His friends and family from home start asking what’s wrong with him. He feels frustrated and ashamed. He blames his advisor, he blames his department, he blames his school. Finally, he grows up and accepts the fact that maybe he’s not the best, but he can still do well if he works hard. He starts listening better, works harder, and ends up quite successful.
이 문서의 두 번째 장은 “Do I really want a Ph.D.? What does a Ph.D. entail?”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박사과정을 고민하거나, 이미 박사과정에 들어온 학생들이라면 꼭 한 번씩 읽어 보길 권한다. 단어 하나 놓칠 것이 없다.
두 번째 참고할만한 사례는 “So long, and thanks for the Ph.D.!”이라는 글에 나온다.
At UNC, there is a famous anecdote about a former UNC graduate student named Joe Capowski. Many years ago, UNC got a pair of force-feedback mechanical arms to use with molecular visualization and docking experiments. The problem was how to move them to UNC. These mechanical arms were large, heavy beasts, and were in Argonne National Labs in Chicago, IL. Unfortunately, there was a trucker’s strike going on at the time. Joe Capowski, on his own initiative (and without telling anyone), flew out to Argonne, rented a truck, drove the mechanical arms all the way back to North Carolina, and then handed the computer science department the bill! Many years later, Joe Capowski ran for the Chapel Hill city council and won a seat. Prof. Fred Brooks gave him an endorsement. I still remember the words Dr. Brooks said: “I may not agree with his politics, but I know he’ll get things done.” (Thanks to Jim Lipscomb for corrections to this anecdote.)
While the Joe Capowski anecdote is perhaps a bit extreme, it does show that it is often better to ask forgiveness than permission, provided you are not becoming a “loose cannon.” Certain universities (e.g. MIT) are good at fostering a “can do” attitude among their graduate students, and therefore they become more assertive and productive. One of the hallmarks of a senior graduate student is that he or she knows the types of tasks that require permission and those that don’t. That knowledge will come with experience. Generally, the senior graduate students have the most freedom to take initiative on projects. This privilege has to be earned. The more that you have proven that you can work independently and initiate and complete appropriate tasks, the more your professors will leave you alone to do what you want to do.
이 문서 역시 읽어보고 음미할 부분들이 많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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